
| 제목 | 승(陞)의 子 정(靖) | |||
| 작성자 | 오경탁(吳慶鐸) [2023-01-13 05:24:3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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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陞)의 子 정(靖) 朝鮮이 開國할 무렵 一四一○年년쯤 出生하였다. 世宗二年(一四二○)閏正月二十九日慶昌府의 丞으로 端宗卽位年(一四五二)의十시月에 中樞院 副使가되었다. 十一月에 千秋使로 明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五月에 歸還하였다. 端宗一年(一四五三)七月에 行中樞院 僉知事였으나 端宗二年(一四五四)八月에 安東의 大都護府使(政三品)로 부임하였다. 世祖九年癸未年(一四六三)에 돌아가셨다. 配昌寧成氏父議政府左贊成成抑에 장가를들어 큰사위 誠寧大君에 이어 둘째사위가 되었다. 成氏부인은 인수대비[昭惠王后]를 거둔 功으로 대비로부터 奴婢90口를 받았으나 성씨부인이 죽은 후에 妾의子인 繼孫과 繼生의 不忠이 드러나 還收되었다. 安東權氏와 文化柳氏 舊譜에 아들인 孝悌가 올라있으나 어려서 세상을 뜬 것으로 보이고 二○一二年三月一日 五五○年만에 安養에서 墓와 碑石을 찾게되었다. 그 빗돌에는 嘉善大夫로서 中樞院副使로 吳靖의 墓(嘉善大夫中樞院副使吳靖之묘)라 새겨져 있고 여기서 묘(廟 사당묘 약자)字는 墓를 대신해서 쓴것으로 보인다. 뒤에는 명나라 천순년간의 칠년팔월임인일에 묻혔다고 새겨져 있다.(天順七年癸未八月十六日壬寅葬) 歷代의 同福吳氏族譜에는 실려있지 아니하고 丙寅譜(一九三六年)까지 父親인 靖平公 陞까지만 실려있고 靖의 이름은 빠져있었다. 辛丑年(二○二一)七月十日 第二次 電子族譜 編纂委員會 會議에서 靖平公 陞의 子 靖, 陞의 사위, 靖의 子 三名을 登載하기로 議決하여 別坐公派 在鎰의 吳靖 墓碑의 小考(대종회 홈페이지 문헌자료 158)를 參考하여 電子(인터넷)族譜에 登載할 內容(陞의 사위, 靖의 이력 그리고 靖의 子)을 事務總長 慶鐸(二十八世孫 默齋公派)이 정리하였다. 참고 英宗睿皇帝實錄 卷三百五十二 天順七年 五月 一日 1번째 기사 1463년
陞(승) 初諱濟富字崇之 號竹軒 恭愍王朝 一三六四年甲辰生 태종임금과 같이 文科에 급제하고 崇政大夫로 中樞院판사로서 修文殿의 大提學을 지냈다. 諡號는 靖平으로 네임금(태조 정종 태종 세종)을 모신 오랜 臣下로 一四一四年 京畿道觀察使로 제수되어 옷(衣) 안팎감 한 벌을 받고 一四二二年에 賀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오니 임금이 친히 보약을 下賜하였다. 十二월에는 태종임금의 諡號를 올리는 일에 있어서 서울에 이르렀을 때 겨울 옷 두 벌과 털갓(毛冠笠) 신발을 하사받았다. 一四二六年十一월에는 咸吉道 관찰사에 藝文館의 大提學이 되고 一四二九年 겨울에 正朝使로서 명나라에 갔다가 一四三○年 皇帝의 勅書와 王世子 朝服 한 벌을 받아서 돌아오니 임금께서 가상히 여겨 말(馬) 안장을 하사하시고 慶會樓에서 잔치를 베풀며 公을 위로하였다. 一四四一年辛酉三月卒 墓선친묘아래유좌 藝場으로 모셨다. 손병춘이 모은 世稿가 있다. 配珍原郡夫人尹氏 一四四四年甲子九月十八日卒 墓合葬 비석과 석상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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