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복은 마한(馬韓)시대에는 비리(卑離)의 치소(治所)였고 백제(百濟)의 두부지현(豆夫只縣)이라 하였고 신라(新羅)시대에 동복(同福)이라 하여 곡성군(谷城郡)에 속하였고 고려조(高麗朝)에는 보성군(寶城郡)에 속하다가 고승(高僧) 조영(祖英:光札아들)의 향리(鄕里)라 하여 감무(監務)를 두었다.
태조(太祖) 3년(1334)에 다시 분리(分離)되어 오다가 1914년 화순군(和順郡)으로 합하였다.
동복의 군명(郡名)의 변천(變遷)으로 보면 비리(卑離),두부지(豆夫只),구성(龜城),옹성(壅城),라복(蘿葍) 동복(同福)의 순으로 되어 있다. 동복면(同福面)의 면적은 62k㎡이며 행정(行政) 동리(洞里)는 22개소 이고 자연부락(自然部落)은 26개소 법정(法定) 동리(洞里)는 12개소 이다.
해방 전후(前後)까지만 해도 동복(同福)의 복(福)자를 따서 '복삼'(福蔘) '복청'(福淸:벌꿀) '복천어'(福川魚) 등의 특산물로 유명했던 화순의 동복은 동복오씨(同福吳氏)의 오랜 세거(世居)의 터이다.
이곳 모후산(母后山) 서록(西麓) 재궁동(齋宮洞)에는 1세 오녕(吳寧)에서 5세 선(璿)에 이르기까지 신위단비(神位壇碑)와 3세 오대승(吳大陞)의 묘소(墓所)가 있다. 일찍이 동복을 중심으로 하여 전국(全國) 각지(各地)로 뿔뿔이 흩어져 곳곳에 뿌리를 내렸던 동복오씨(同福吳氏)의 자손들의 집성지(集姓地)로는 제주도(濟州道) 북제주군(北濟州郡) 추자면(湫子面)과 전남(全南) 순천(順天),여수(麗水),완도(莞島),진도(珍島),고흥(高興),장흥(長興),해남(海南),신안(新安),보성(寶城),강진(康津),영암(靈巖),함평(咸平),화순(和順),전북 고창(高廠),남원(南原),정읍(井邑),김제(金堤),완주(完州),옥구(沃構),익산(益山) 등지를 들 수 있다. 또한 충남 서천(舒川),보령(保寧),청양(靑陽),논산(論山),금산(錦山),공주(公州) 등지 충북(忠北) 청원(淸原),옥천(沃川),중원(中原),제천(堤川),단양(丹陽) 등지와 경북(慶北) 의성(義城),경남(慶南) 진양(晉陽),함양(咸陽),강원도(江原道) 양구(楊口),홍천(洪川),원주(原州),경기도(京畿道) 연천(漣川),고양(高陽),남양주(南陽州),시흥(始興) 등지에도 자손(子孫)들이 많이 살았다.
그리고 이북(以北) 지역(地域)에서는 해방전 평남(平南) 평원(平原)과 황해도(黃海道) 연백(延白),옹진(甕津),장단(長端) 등지에 많이 살았다.
지금은 서울 수도권(首都圈) 지역에서 대다수(大多數)가 살고 있으며
2015년도 통계청 한국성씨(본관)별 인구수 현황에는 해주오씨(海州吳氏) 462,704명,동복오씨(同福吳氏) 72,394명,군위오씨(軍威吳氏) 26,949명,보성오씨(寶城吳氏) 71,162명,함양오씨(咸陽吳氏) 35,846명,고창오씨(高敞吳氏) 18856명,나주오씨(羅州吳氏) 18,152명,금성오씨(錦城吳氏) 14458명,낙안오씨(樂安吳氏) 11,652명, 기타(7개본) 31,198명 총계 763,281명(16개본)으로 전국 성씨 12위이다.
오씨(吳氏) 24세손(世孫) 해주군(海州君),동복군(同福君),보성군(寶城君) 삼군(三君)은 동조동근(同祖同根)이다. 충남(忠南) 공주(公州)취리산(就利山)에 해주(海州),동복(同福),보성(寶城) 오씨의 시조를 모시는 금양단(錦陽壇) 신단(神壇)이 있어 매년 후손들과 지방 사림(士林)이 모여 제사(祭祀)를 지내고 있다.
동복군(同福君) 오현좌(吳賢佐)는 두 아들을 두었다. 큰아들 녕(寧)도 아버지에 이어 동복군(同福君)에 봉(封)해져 1세가 되어 세계(世系)를 이어 오고 있고 둘째 아들 숙귀(淑貴)는 군위오씨(軍威吳氏)로 분적(分籍)하였다. 녕(寧)의 3세손 대승(大陞)은 고려(高麗) 원종(元宗)때 (서기1260년)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벼슬이 시중(侍中)까지 올라 문헌(文獻)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나중에 동복현(同福縣:현 전남(全南) 화순군(和順郡) 동복면(同福面)에 낙향하여 여생을 보냈다. 그는 이곳에서 암석(岩石)에 석등(石燈) 48개를 만들어 밤마다 점화(點火)해 국태민안(國泰民安)과 후손들의 융성(隆盛)을 기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석등(石燈)은 현재 원형(原形)대로 보존되어 지방문화재(地方文化財) 62호로 지정 되었다.
동복오씨(同福吳氏)의 묏자리인 전남 화순군(和順郡) 동복면(同福面) 모후산(母后山)에는 1세 오영(吳寧)과 그의 아들 중환(仲環),4세 고려(高麗)조정대부(朝靖大夫)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 오광찰(吳光札),5세 광정대부(匡靖大夫) 선(璿)등 4위의 신단(神壇)과 문헌공(文獻公) 대승(大陞)의 묘 등 동복오씨 17개파 전 문중 후손들이 한자리에 모여 시월 초정일(十月 初丁日)에 제사(祭祀)를 지내고 있다.
동복오씨(同福吳氏) 세적(世蹟)에 따르면 봉군(封君)은 녕(寧),잠(潛),백령(百齡) 등 3명,상신(相臣)은 대승(大陞),시수(始壽)등 2명이다. 시호(諡號)는 대승(大陞),선(璿),천(薦),식(軾),윤감(允瑊),유년(有年),승(陞),백령(億齡),광운(光運) 등 10명이다. 학행(學行)은 억령(億齡),백령(百齡) 형제(兄弟)이고 생진(生進)은 75명, 문과(文科) 급제(及第)는 28명 무과(武科)는 32명 정도이다.
참조(參照) : 국조방목(國朝榜目)
이 밖에 효행(孝行)51명, 충의(忠義)11명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참조(參照) : 진신관작보(縉紳官爵譜)
제각(祭閣)은 동복(同福)의 효사재(孝思齋) 외에 전북 김제시 신월동의 경모재(敬慕齋),남원시 산내면 매동의 경모재(景慕財),전남 해남군 오산의 효모재(孝慕齋),계곡면 사정리의 용지사(龍池祠) 등이 있다. 고려조(高麗朝)의 동복오씨(同福吳氏) 인물(人物)로는 동복군(同福君) 현좌(賢佐) 동복군(同福君) 녕(寧) 부자(父子)를 비롯하여 시중(侍中) 문헌공(文獻公) 대승(大陞),조정대부(朝靖大夫) 광찰(光札)과 그의 아우 재신(宰臣) 광명(光明),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 광식(光植),광붕(光棚)등 4형제. 광찰(光札)의 아들 문정(文靖) 선(璿),대선사(大禪師) 조영(祖英).선(璿)의 큰아들 문제(文齊)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잠(潛),삼사좌윤(三司左尹)을 지낸 천(潛), 밀직사사(密直司事) 선(璿),상서(尙書) 윤백(允伯).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윤후(允侯),한림승지(翰林承旨) 자귀(自貴),좌윤(左尹) 윤감(允瑊),상서(尙書) 유년(有年) 등이 있다.
동복오씨의 대표 인물은 광찰(光札)의 10세손 세현(世賢)의 아들 억령(億齡),백령百齡) 형제(兄弟)이다. 이때부터 동복오씨는 본격적으로 중앙(中央) 정계(政界)에 진출 기라성(綺羅星)같은 명현(明賢)을 배출하면서 명문(名門)의 위치를 굳혔다. 의제(儀制) 오전(吳詮)은 중종 36년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삼도해운판관(三道海運判官)에 이르고 의재문집(毅齋文集) 상하권(上下卷)이 있다.
만취(晩翠) 오억령(吳億齡)은 조선조 선조 15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히고 벼슬에 있는 동안 대사헌(大司憲) 5회 형조판서(刑曹判書) 3회 등을 역임 40여년간 벼슬에 있으면서 검소(儉素) 청렴(淸廉)하니 청백리(淸白吏)에 녹선(祿選)되고 문장(文章)과 서예(書藝)에도 뛰어나 만취문집(晩翠文集)을 남겼다.
그의 아우 묵재(默齋) 오백령(吳百齡)도 문과(文科)에 급제 도승지(都承旨),대사헌(大司憲),이조참판(吏曹參判) 등을 지내고 복천군(福川君)에 봉군(封君)되었다. 이 집안에서만 8판서(判書)를 배출하였다. 동복오씨의 인물은 거의가 이들 형제의 후손이다. 조선조(朝鮮朝) 인물중 정평공(靖平公) 승(陞)도 크게 돋보인다.
문헌공(文獻公)의 6세손인 그는 공조판서(工曹判書),대제학(大提學)과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를 역임했다. 이조참판(吏曹參判) 시절 주현둔전제도(州縣屯田制度)를 개설했고 역사상(歷史上) 처음으로 군주(君主) 정치(政治)의 독선(獨善)을 배제하고 민주적(民主的)인 국민투표를 창안(創案), 왕(王)의 재가(裁可)를 받아 실행에 옮긴 장본인이다. 저서(著書)로는 죽헌유고(竹軒遺稿)가 있다. 동복오씨(同福吳氏)는 조선조(朝鮮朝)에 문과(文科) 급제(及第) 28명이다. 국조방목(國朝榜目) 참조(參照) 우의정(右議政)1명(始壽).호당(湖堂)1명(億齡)등을 배출했다. 한림학사(翰林學士).자귀(自貴)의 증손(曾孫) 준(浚:1444~1494)은 조선조(朝鮮朝)의 손꼽히는 효행(孝行) 자(者)로 이름난 인물이다.
그 효행(孝行) 사적(史蹟)으로 남아있는 전북 고창군 신림면 외화리 효감천(孝感泉)이 지방문화재(地方文化財) 사적(史蹟)으로 지정되었다. 의재(毅齋) 오전(吳詮)은 가정(嘉靖)16년 정유(丁酉) 1537년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 병과(丙科)에 급제 영남(嶺南)지방 암행어사(暗行御史)를 거쳐.삼도해운판관(三道海運判官)을 역임하고 지병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유고(遺稿)는 의재(毅齋) 문집(文集) 2권이 있다. 오억령(吳億齡)의 아들 오익(吳翊)은 선조36년 문과(文科)에 급제(及第).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이 되어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손실된 이조실록(李朝實錄)의 재간(再刊)에 공헌했고.승지(承旨) 등 벼슬을 지내면서 명(明)나라를 다녀 오기도 한 명필(名筆)이었다. 오백령(吳百齡)의 아들 오준(吳竣)(광해10년)도 문과(文科)에 급제(及第) 효종조(孝宗朝)에 형조판서(刑曹判書)를 현종조(顯宗朝)에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냈으며. 당시(當代)의 국필(國筆)로 이름을 떨쳤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서울 송파(松坡)의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전남 영암군 월출산(月出山)에 있는 보물급 문화재(文化財) 선국사비문(道詵國師碑文),충남 아산(牙山)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將軍) 신도비문(神道碑文) 등 그의 필적(筆跡)은 전국 각지에 많이 남아있다.저서(著書)로는 죽남당유고(竹南堂遺稿)가 있다. 오준(吳竣)의 아우 오단(吳端) 역시 인조2년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 황해도 관찰사(觀察使) 등을 역임했고. 오익(吳翊)의 아우 오전(吳竱)도 같은 해 문과(文科)에 급제(及第) 충직(忠直)한 암행어사(暗行御史)로 이름을 날렸다. 또한 오단(吳端)의 아들 오정일(吳挺一)이 문과(文科)에 급제(及第) 승지(承旨)를 거쳐 황해도(黃海道),경기도(京畿道) 등 관찰사(觀察使)와 대사헌(大司憲),이조판서(刑曹判書) 등을 역임했고. 경기도(京畿道) 관찰사(觀察使) 재직시 휼민(恤民) 선정(善政) 송덕비(頌德碑)는 경기도 지방문화재(地方文化財)로 지정(指定)되어 있다.
오전(吳竱)의 아들 오정위(吳挺緯)도 인조10년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 관찰사(觀察使)와 형조판서(刑曹判書) 등을 두루 거쳤다. 오백령(吳百齡)의 손자 오정원(吳挺垣)은 효종 원년(孝宗 元年)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 서해(西海),호서(湖西) 등 관찰사(觀察使)를 지냈고. 오단(吳端)의 아들 오정창(吳挺昌)은 대사헌(大司憲),예조판서 (禮曹判書)를 지내고 특히 오정원(吳挺垣)의 아들 오시수(吳始壽)는 암행어사(暗行御史),관찰사(觀察使),도승지(都承旨),형조판서(刑曹判書) 등을 거쳐 우의정(右議政)을 숙종(肅宗)5년까지 지낸 당대(當代) 동복오씨(同福吳氏)의 큰 별이다.
이 밖에 조선조(朝鮮朝)의 오시복(吳始復:숙종) 이조판서(吏曹判書),오시만(吳始萬:숙종) 대사헌(大司憲),오시대(吳始大:숙종) 관찰사(觀察使),오상유(吳尙游:숙종) 해운판관(海運判官), 오광운(吳光運:숙종) 예조참판(禮曹參判),오달운(吳達運:숙종) 오수찰방(獒樹察訪)을 지내고 성리학(性理學)의 대가(大家)이다.
오인영(吳麟泳:철종) 승지(承旨), 오필운(吳弼運:정조) 예빈직장(禮賓直長),오대익(吳大益:영조) 호조참판(戶曹參判)이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때는 오유(吳宥),오정달(吳廷達),오극신(吳克信),오홍적(吳弘績),오대무(吳大武),오신령(吳信齡) 등 6충(忠)의 열사(烈士)가 순국(殉國)했고,병자호란(丙子胡亂)때 오정직(吳挺稷)과 무신란(戊申亂)때의 오한필(吳漢弼)은 2,000여명의 의병(義兵)을 거느리고,반군을 토벌하기도 했다.
특히 오현영(吳憲泳)은 순종 경술(庚戌)년 한일합방(韓日合邦)의 비보를 듣고 독립(獨立) 투사(鬪士) 나만성(羅萬成),김상수(金相洙) 등과 함께 청(淸),몽고(蒙古)에 근거(根據)를 개설하고 13년간 항일(抗日) 투쟁(鬪爭)을 하다 순국(殉國)한 인물이다. 이 밖에 오준상(吳準相)은 충청도(忠淸道) 의병장(義兵將)으로 상해(上海) 임시정부(臨時政府) 주석(主席) 백범(白凡) 김구(金九)와 밀통, 광복(光復)에 힘쓰다 붙잡혀 오래동안 복역(服役)하기도 했다.
동복오씨(同福吳氏)는 조선조(朝鮮朝) 초기(初期) 이후 벼슬을 마다하고 문학(文學),철학(哲學),사상(思想),실학(實學) 등 학문(學問)에 정진(精進)한 명현(名賢)들이 두드러지게 많다. 그 결과 오억령(吳億齡)의 유고(遺稿)인 만취문집(晩翠文集)을 비롯 20여명의 문집(文集)과 시고(詩稿) 등 많은 저서(著書)를 남겼다. 이에 따라 1981년 동복오씨(同福吳氏) 문헌선양회(文獻宣揚會)가 발족(發足)되어 씨족사(氏族史) 정립(定立) 목표로 선조(先祖)들이 남긴 고문헌(古文獻)의 번역(飜譯)과 가승(家乘)의 정통(正統) 계승사업(繼承事業)을 활발하게 추진 동복오씨(同福吳氏) 세적지(世蹟誌:국역판) 2집을 발간(發刊) 하기도 했다.
동복오씨(同福吳氏)문헌선양회(文獻宣揚會)편집(編輯)
1차 교정(2020.6.29) : 동복오씨대종회 사무총장 오경탁(28世孫 默齋公派)